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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삶

운명 - 임레 케르테스 #1 책을 시작하며

by 공동이색상자 2018. 3. 13.


책을 읽다 궁금한 지점이 생기면 잠시 멈추고 궁금했던 것들이 해소될 때까지 관련 내용들을 찾아보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책을 읽는 속도가 상당히 느린 편입니다.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관련된 책을 네댓 권을 읽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정도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소설의 경우는 어떤 지식을 주는 부분이 적다 보니 금세 희미해지더군요.


책을 읽어나가면서 정리를 하고, 관련된 내용들을 작성하면서 책을 보다 꼼꼼히 읽어나가려고 합니다. 

몇 번이 될지 몰라도 계속 글을 작성하다 보면 한 권의 책을 다 읽게 되겠죠. 보통의 방법보다는 더 많은 부분을 남기고 정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더불어 제가 작성한 글들을 보고 관심이 생겨서 책을 읽어보거나 혹은 관련된 배경이나 내용을 살펴보고 책을 함께 읽어나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분히 주관적으로 적히게 될 가능성이 높은 글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네요. 그렇기에 분명히 잘못된 내용들이나 곡해한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부분은 언제든 언질을 주시면 관련된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살펴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토론은 보다 저를 성장시킬 테니까요. 


이런 생각들을 담아 처음 뽑은 책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란 소설입니다. 오래전 몇 번이나 보았던 책이지만 당시에는 관련된 지식이 부족했고, 시대적이나 역사적인 내용들을 잘 알지 못해 지금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책입니다. 

이번에 이런 글들을 작성하겠다 마음 먹고 보다 심도있게 읽어볼 생각입니다. 아직 못 읽어보신 분들이 계신다면 책을 선택하고 읽어나가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운명 - 임레 케르테스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 우리 출판









임레 케르테스


1929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임레 케르테스가 1944년 15세의 나이로 나치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1945년까지 강제수용소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라는 점에서 어떤 면으로는 길게, 어떤 면으로는 그리 길지 않게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수용소의 삶에서도 행복이 있었다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1년 밖에 지내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치가 전쟁 막바지에 유대인 말살을 더욱 치열하게 집행했던 역사를 보면 그 기간이 짧다고만 말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소설 '운명'은 임레 케르테스가 강제수용소에서 나온 후 30년이 지나 집필된 책으로 그의 첫 소설입니다. 물론 '운명'을 집필하기 전에 번역을 하는 둥 관련 일을 계속 해왔던 인물입니다. 실제로도 그가 번역했던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등의 저서가 영향을 주었다고 하죠. 이렇듯 철학서를 주로 번역했던 것이 소설 '운명'을 집필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운명'의 원제는 '소르슈터렌서그'라는 헝가리어로 '운명 없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후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를 출판하며 '운명' 3부작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 '운명' 3부작의 가장 첫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입니다. 


이후로도 다양한 책들을 통해 1990년대 말까지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 유럽 사회에 일어났던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작품화했습니다.


집필한 책을 통해 많은 상을 받았는데, 수많은 수상 경력을 이어오다가 200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6년에 오랜 투병 끝에 타계했습니다. 



'운명'은 소설이다.


'운명'은 죄르지라는 소년이 15세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겪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임레 케르테스도 15세에 강제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유대인이기에 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는 이것을 소설이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소설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을 말합니다. 소설 '운명'은 죄르지라는 가상의 소년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만큼 허구적인 요소가 있겠으나, 대부분의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경험이 담겨있다는 것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로 주인공인 죄르지처럼 작가 본인도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살았던 외아들로 15세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었죠. 그럼에도 회고록이 아닌 소설로 집필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회고록의 경우 개인의 감정이나 기억에 기인하는 특성상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읽는 이도 화자인 작가의 입장에서 글을 읽어나가죠. 하지만 죄르지라는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작가와 이야기를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죄르지의 시점이 작가 본인의 시점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저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죄르지가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던 순간들에도 행복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이 부담되어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생존작가들은 강제수용소를 엄청나게 끔찍한 곳으로 표현하곤 했으니까요. 여기서 소설 '운명'과 큰 차이가 보입니다. 소설 '운명'은 모두가 끔찍하다고 말하던 그곳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심지어 그곳에서 행복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다른 생존작가들이 말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작가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부담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관점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쓰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서 쓰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작가는 실제로 여러번 자신의 경험을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밝혀왔습니다. 또 그가 말년까지 고독하게 살았던 이유가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 탓이라는 것을 다른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가 임레 케르테스가 아닌 죄르지를 화자로 등장시킨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헝가리가 유대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 공감대가 적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는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집필에 20년이 걸렸던 소설이 30년이 되어서야 발표가 된 것에는 헝가리 사회가 유대인 학살 문제에 공감대가 적었던 탓도 있다고 합니다. 또 발간된 이후에 조명받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사회의 인식이 변화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헝가리 사회가 어째서 유대인 학살 문제에 대해 공감대가 적었던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세계 2차대전 당시 헝가리의 잃어버린 영토를 찾기 위해 독일-이탈리아 측에 가담했었던 헝가리라는 점을 보면, 독일의 유대인 혐오 정서를 받아들였던 것이 원인은 아니었을까 유추를 해봅니다. 그렇다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후 독일은 자신들의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 과거를 인정하고 대대적인 사과와 반성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헝가리 역시 그런 비슷한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물론 독일이 헝가리가 참전 이후 헝가리 내부에 반 나치 진영이 부담되어 완전히 점령해버렸던 역사를 미루어 보면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학살의 문제를 독일 나치의 문제라고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응당 맞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학살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나치의 문제였으니까요. 그리고 식민지로서 이후 폐허가 되었던 헝가리는 자신들의 피해 복구로 인해 유대인 학살 문제에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부를 하다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해 소설 '운명'은 30년이 지나서야 출판되었고, 이후 야만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는지, 또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의 본성이 작동하는지를 탐구한 공로가 인정받아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죠.


'운명'은 유대인 학살의 참상이 이어졌던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도 인간의 본성이 작동하는 과정을 15세 죄르지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처럼 소설 '운명'은 단순히 강제수용소의 문제 등을 고발하기 위해 쓰인 소설이 아닙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작동하지는 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런 장소로 자신이 경험했던 강제수용소의 이야기가 극한의 상황으로 차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15세의 소년이 나이에 맞지 않는 냉정함과 침착한 묘사를 한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15세 소년이 너무 조숙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럴 수 있겠다 스스로 납득했지만요.)

작가는 이런 비판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통해 수용소의 상황을 정확하게 나타내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실제적인 증거를 통해 당시를 고발하는 것이라 원근법을 통해 그 상황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저 역시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시선이 아니라 단순히 그곳을 고발하고자 했던 경험담으로서 '운명'을 읽었기 때문에 가졌던 의구심이었을 것입니다. 


'운명'은 이런 소설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이제 읽어나가며 작가가 하고자 했던 부분에 더 집중해볼 것입니다.


2018/03/14 - [읽는 삶] - 운명 - 임레 케르테스 #2 유대인 죄르지

2018/03/13 - [읽는 삶] - 운명 - 임레 케르테스 #1 책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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